우리마을유래
경상북도 청도군 금천면 방지리(芳旨里)
상세내용
운문면 대천리의 한내재 봉(峰)이 이어져 내려와 마을 뒤편을 병풍처럼 서 있고 다시 이어져서는 동곡현(東谷峴)에서 분기된 지봉은 마을 서편을 감고 돌면서 동창천변에서 멈추어 섰다. 동은 대천리로 이어지고 있으며, 내(川) 너머로 호산(虎山)이 버티어 서 있다. 마을 앞은 기름진 천변의 충적토로된 들로 마을을 기름지게 하고 멀리 억산(億山)이 안대(案臺)가 되어 방지(芳旨)라는
마을 이름 그대로를 엿보이게 한다.
지형적으로 보아 취락은 오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가 서진하는데 있어서 당시의 관도변(官道邊)이고 이 마을 동쪽인 운문면과의 경계는 교통의 험구(險口)로 홍수시는 대천에서 소천으로 우회를 해야만 되는 이곳에(또는 山嶺迂廻) 주민이 없었다고는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500년대부터 택리가 밝혀지고 있다. 1리에는 1600년대에 나주인 정 혁 공이 입촌하여 정주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2리에는 1리보다 양 50여년 앞인 1500년대 중엽에
경주인 이종현 공이 후손의 번창할 곳을 찾아 울산에서 경주로, 언양으로, 택리를 위해 찾아다니다 정한 곳이 이 마을이라 한다. 3리에도 임란 전에 김해 김씨가 입주하여 마을터를 굳혀 나갔다. 원래는 중동(中東)면으로 상방지(上芳旨), 하방지(下芳旨)를 합쳐서 방지(芳旨)라 하였다. 방지의 동명은 동창천변의 자갈과 모래가 하도 눈부시게 아름다워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굼마
동네를 열 당시 들의 제방이 튼튼하지 못하여 홍수를 자연에 맡기고 마을 주변의 산기슭을 개간하여 농사를 지으니 하도 토지가 천박하여 굶주림의 마을이라 하여 굶마을, 굶말, 굼마로 변음된 것이라고 믿어진다.
하방지(下芳旨)
마을의 위치상 아래쪽이라고 붙여진 동명이고 철성 이씨가 주종을 이루고 있는 마을이다.
당걸
당제(堂祭)의 신목 즉 당나무가 있는 곳이라 불리어진 마을 이름이다.
상방지(上芳旨)
하방지보다 위쪽에 자리한 마을이라고 붙여진 이름이다. 방지라는 동명은 앞에서 말한 것보다 마을 뒤가 상릉이 둘러져 있고 마을 앞에는 들과 동창천이 있다. 멀리로는 임당(林塘)리 뒷산에 많은 등성이와 봉우리가 있으며 더 멀리로는 억산(億山)의 봉우리들이 이어져 나가는 원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위치라 이런 풍경이 절승(絶勝)이라 하여 동명으로 이름 지어진 것이 아닌가 싶다.
오시
본 면에서는 가장 넓은 수리안전답이다. 풍부한 동창천을 보(洑)로 인수하여 이용하는 문전옥답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