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유래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오진리(梧津里)
상세내용
문복산(文福山)의 산줄기들과 운문산의 연봉들이 이중삼중으로 겹겹이 감아 돌면서 여기 저기 골을 이루고 계곡마다 계천이 흘러 깊고 얕은 계곡들이 무수한데 시냇가에 취락이 형성된 마을이다. 오직 남북으로 운문천을 따라 골이 열려 있어 앞 뒤 할 것 없이 산봉(山峰) 또는 산등(山嶝)이 솟아 있어 산중다운 정취가 풍기는 곳이다. 오진리는 인근의 운문사 즉 오작갑사(烏鵲岬寺)와 지연적으로 밀접한 관련이 있는 마을이다. 가슬갑사(嘉瑟岬寺)를 중심한 이 일대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자 원대한 국책을 수립하여 실천에 옮길 때 이곳도 화랑들이 발자취가 스며든 곳이라 하겠으나 당시의 내력은 인위적으로 혹은 자연적으로 소멸되고 다만 1600년을 전후하여 남평인 문진호 공이 입주하였다는 것만 알 수 있다. 그러나 일설에는 밀양 박씨라고도 한다. 소진(小津)에도 임란을 전후하여 김해 김씨가 정착하여 동의 기틀을 잡은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오이(梧耳), 오릿골
옛날 대홍수로 주민들이 피신을 할 때 오동나무 배를 타고 이곳에 닿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산중에 배가 있을리가 없고 그렇다고 위태로울 때를 미리 헤아려 배를 미리 마련한 것도 아닐 것이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오동나무 토막에 의지하여 구명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 오동나무 토막을 배로 비유한 것이라고 믿어진다. 또 다른 설은 이 곳에 오동나무가 많아서 오릿골 즉 오곡(梧谷)이라 부르다가 변한 음이 오이골로 되어 오이(梧耳)로 표기한 것이 아닌가
믿어진다. 구전대로라면 오주곡(梧舟谷)으로 마을 이름이 지어져야만 타당할 것으로 믿어진다. 아무튼 오동나무와는 관련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소진(小津)
옛날에 대홍수가 나면 다리가 없어 배로 건너다니던 작은 나루터라고 소진으로 마을 이름으로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소진이란 동 이름이 운문댐으로 인해 다시 글자 그대로 현실화가 된 것 같다. 공사가 완공되어 역시 배편 이용이 가능하다. 당시에 산골이 급류와 암석투성이의 운문천을 과연 배로 건너다닐 수가 있었겠나 하는 점에는 의문이 가나 지명대로 현실과 부합되는데는 신기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정쟁이, 정상(頂上)
경주와 경계지로 사방을 바라볼 수 있는 곳이고 정쟁이 즉 정상으로 표기한 것이라 여겨진다. 지대가 높은 곳을 뜻한다.
제부리(製釜里)
솥을 구워낸 마을이라고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에 제부(製釜-솥을 만듦)의 내력은 신라시대부터다. 이 마을은 당시에 철을 산출하여 신라군의 무기를 생산한 곳으로 이런 곳은 경주로 가는 길목에 허다하다. 현재도 점터의 유적지가 확인되고 있다. 이런 환경 하에서 철(쇠)을 다루던 기능공의 후예들이 솥을 만들어낸 것이 아닌가 싶다. 신원리, 방음리 등지에서 생산된 운문솥은 일제시대까지도 전국에 명성이 높았다. 이런 배경에는 기능공과 철과 목탄이 풍부했기 때문으로
보아진다.
기타 자연부락으로는 용방(龍坊)과 상말(上里), 숲안이 있다. 화랑들에게 무기를 공급하던 시대는 군산 비밀기지로 일절 기록을 남기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하여 문헌이 거의 없으니 애석하기가 말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