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유래

제목각남면 화리

 

경상북도 청도군 각남면 화리

상세내용

남산이 무슨 일로 급하게 내리닫다가 놀라 멈춘 북정(北征)골에서 경사진 비탈을 따라 층층이 서향으로 자리잡은 마을이다. 마을 앞 좁은 계천이 젖줄처럼 이어지다 끊어질 듯 흐르고 북쪽으로 갈수록 낮아서 끝내는 청도천에서 끊어지고 만다. 부근에는 아득한 청동기 시대의 유물이 발굴된 마을이 있으나 어쩌면 까마득히 잊어진 과거사에 미련마저 가질 수 없을 정도다.
구전으로는 노씨(盧氏-본관미상)가 부자로 행세하면서 구혈(救血)도 많이 하여 송덕비까지 세워졌다 하나, 가계나 기타 일체가 사라져버려 아는 이도 없고 알 수도 없다.

화리(華里)
동명은 화악산에서 인용했다 하나 그리 오래되지 않은 마을이라 별다른 뜻은 없는 것으로 보여진다. 이 마을의 동명을 원래는 어떻게 불렀는지 미상이나 조선시대 1834년간(순조 34년) 청구도(靑丘圖) 청도군읍지에 마곡(麻谷-마실, 삼실)로 기록되어 있다. 이 이전의 촌명도 역시 마곡(麻谷)이라 불렀을 것이다.

마곡(麻谷)
당시 이 마을 부근일대가 밭이 많이 삼(마-麻)농사를 주로 하여 삼이 많이 나는 곳이라고 붙여진 동명이다. 삼의 적지로 행정적인 장려도 있었는지의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

구랑(九郞)
윗마을로 화 2동 또는 합동(合洞)으로 불리며 분동, 합동이 수 차례나 반복이 된 마을이다. 구전으로는 경주 최씨 문중에서 아홉 분이 랑자(郞字) 벼슬을 하여 붙여진 동명이라 한다. 랑자의 동명은 유일무이한 동명으로 희귀한 글자로 된 마을이다.

북정(北亭)사 사지
마을 남쪽 소강(小岡)위에 위치한 작은 절이다. 아마도 1700년 중엽에 여지승람에 기재되지 않은 사찰이라 철폐된 것 같다. 현재는 복숭아밭이 되어 있고 기와 조각이 많이 산재되어 있으며, 석불은 10여년 전까지 잔존되었으나 다른 절에서 안치하기 위하여 가져갔다는 것이다.
동제는 정월 보름에 두 곳 신목에게 치성하는데 상단(上壇) 신목은 무학산(舞鶴山)에 있고, 하단(下壇)은 동리 입구에 있다. 상단 신목에는 동리와 동면의 무사안녕을 기원하고, 하단 신목은 당시 관도(官道)변에 있어서 여행객의 무고를 기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확실치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