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유래
경상북도 청도군 각남면 칠성리
상세내용
남산(南山)지맥중의 하나인 갈마(渴馬)봉이 굴곡도 다양하게 마을의 동쪽을 달려와 우뚝 멈추는 바람에 외묵치(外默峙)와 안산치(案山峙)등 고개 길이 마을로 이어져 있다. 칠성천과 화동천이 좁다랗게 합류하는 계천변을 따라 취락된 마을이다. 선사시대의 유물인 지석묘가 남아 있어 아득한 옛날부터 주민이 살았음을 알 수 있으나 기록이 없음은 다른 마을과 마찬가지다. 코앞에 청도천이 흘러
남고북저의 지형구조도 대동소이하다.
칠성리는 마역(麻亦)동과 향인(向人)촌, 월곡(月谷)촌으로 되어 있다. 지방행정개편 시 동명은 대부분 합친 마을에서 글자를 따서 동명을 정했는데 이 마을은 그렇지 않다. 지석묘 7기가 남은 것을 별똥이라고 칠성(七星)으로 정했다는 것이다.
1리는 마역동과 월곡인데 마역리(麻亦里)는 수리가 완전치 못한 시대에 논보다는 대부분이 밭이라 의생활의 기간이 된 삼(麻) 농사가 성행하여 인근의 화동(和同)과 같이(麻谷) 이 곳도 역시(亦) 삼을(麻) 주로 한데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조(趙)들마을
조부자가 약 200여년전에 거주한데서 유래된 이름이나 월곡(月谷)리로도 불린다. 남산의 달밤 경치가 워낙 아름다워 이 일대를 월곡(月谷)이라고 불렀다는 설도 있으나 각종 지리지에는 기록이 없고 다만 화동 거주의 영일 정씨 세보에서 기록된 것을 볼 수 있다.
향인촌(向人村)
2리에는 1500년경에 아산인 장희윤 공이 정착하여 유교의 바탕인 인(仁)을 숭상하는 뜻에서 동명을 정했다 한다. 그러나 오산지(鰲山誌)에는 사인촌(舍仁村)으로 표기되어 있다. 음의 잘못된 발음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일명 향죽(向竹)이라고도 한다. 이는 향인촌과 아래 마을인 죽촌을 합칭하는 것이다.
2리에는 절터가 있다. 동리남쪽 1km 지점인 남산 중턱 골짜기이다. 창건연대, 절 이름, 폐사 원인, 연도도 아는 이가 없다. 절터가 규모로 보아 그리 크지는 않게 보이나 축대가 상존하고 있다. 추측컨데 1700년대에 동국여지승람에 기재되지 않은 사찰에 대한 철거시에 철거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