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유래

제목화양읍 동상리

 

경상북도 청도군 화양읍 동상리

상세내용

남산에서 수려하게 뻗은 낙안(落雁)봉과 중산구릉(中山丘陵)을 이룬 중앙에 취락된 청도읍성내 마을이다. 지대가 높아 옛 시인은 반공(半空)에 유평지(有平地)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마을 앞은 멀리 갈마(渴馬)산이, 북으로는 팔조령(八助領)이 아련히 조망되기도 한다. 멀리 만고불파(萬古不破)의 동산능(東山稜) 용맥이 숨쉬고 있기도 한다. 지금도 이 마을에는 동헌(東軒)이 남아 있고 읍성(邑城)지와 봉일루(捧日樓)인 동문지가 잔존하나 군현(郡縣)소재지로 1250년 이후 800여년간의 유지(遺趾)가 너무나도 초라하다.
1752년경 청도인 김익조 공이 입주하면서 청도를 본관으로 하는 김씨들이 동풍(洞風)진작을 위한 노력이 대단했을 것이라고 믿어진다. 그후로 본관미상의 이씨, 인동 장씨, 흥해 최씨들이 입촌했다.
현존하고 있는 동헌은 1636년(인조 14년)에 이갱생 군수가 소건(所建)한 것을 1666년(현종7년)에 윤의지 군수가 이건하고, 1676년(숙종2년) 옛터로 다시 서문중 군수가 이건하였다 한다. 이유는 윤의지, 유비, 권 일군수가 연달아 횡사했기 때문이라 한다. 서군수가 이건을 해놓고 동헌으로 사용하지 않아 70여년간을 방치하여 폐옥된 것을 이 협 군수가 1740년(영조17년)에 서향으로 또다시 이건한 것이 현재의 동헌이다.
다행히도 동헌 상량문이 보존되어 있어 당시의 임원들을 알 수 있다. 동상리는 면·리제가 실시되기 전은 성내(城內)촌이다. 다만 동문이 있는 곳은 「동문골」이라 했고, 읍시장이 번창할 때 곡물창고가 있는 곳은 「창(倉)마당」이라 불렀다. 면·리제 실시로 동리를 확정할 때 동헌이 있는 동쪽 마을이라 하여 동상으로 명을 정한 것이다. 동문은 임란때 소실된 것을 1862년에 이 경 군수가 소건하여 봉일루라 게판(揭板)하여 위용을 자랑했으나 일본제국이 한국문화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신작로 개통을 이유로 훼철(毁撤)시킨 것이다.(1920)현재 유지로는 읍성지, 동문루지, 청덕(淸德)루지 등이 있다. 특히 청덕루는 그 웅장 화려함이 널리 알려졌을 뿐만 아니라 많은 선현들의 시구가 현판되어 있었다. 현재 서지(書誌)에 수록된 분들로는 려말선초의 대문장가요 정치인인 권 근선생과 전녹생 선생을 들 수 있다. 기록을 보면 청덕루는 청도의 대명사로 불리었다고 전해진다. 구전에 의하면 첫째가 냉천(冷泉), 두번째가 광암(廣岩), 세번째가 청덕루(淸德樓)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