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유래
경상북도 청도군 화양읍 소라리
상세내용
주구산(走拘山)의 목 부분과 어깨 언저리에 자리하고 있다. 청도천변을 따라 길게 비옥한 들이 있다. 보(洑)가 좋아 수리가 잘 되어 있고, 은왕봉이 바라보이는 전망이 일경이다. 특히 백설이 덮혀 있는 은왕봉의 설경은 한층 경승이라 한다.
폐성(吠城)에 있던 산성(山城)리가 없어지면서 이 마을로 이사 온 사람을 중심으로 소라리를 이루었다 한다. 그런데 당시의 주민들의 성씨와 규모는 확연치 않다. 다만 알 수 있는 내력은 1567년에 경주인 이정한 공이 정촌(井村-원정리)에서 입촌하여 마을의 기초를 다시 굳혀 나갔다 한다. 산 위인 폐성 부근에서 이 곳으로 터를 옮긴 이유는 농사 여건이 좋지 않는데 있었을 것이다. 발리산(拔鯉山)을 돌아 흐르는 청도천이 좁디 좁은 들판을 침수시킨 것이 어찌 한
두 번뿐이며 제방을 쌓아 보아야 얼마나 튼튼하게 쌓았을까? 쌓고 터지고 하는 숨바꼭질을 반복하면서 자연과 인간이 끝없는 씨름을 계속하면서 살아간 것이 이 동리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지만 혼신의 힘으로 마을을 지키고 들을 지킨 정신을 높이 평가하여야 할 것이다.
소라(所羅)
아침햇빛에 마을 뒷산이 비단과 같이 아름다워 나산(羅山)으로 불렀으며 청도천의 소(沼)를 매설하여 나가면서 마을터전을 넓히고 들을 일구어 나갔기 때문에 소(沼)자를 소(所)자로 교체했다는 설이다. 그러나 일설에는 나산이라는 마을 이름을 소라로 개명한 것은 "비단 같은 곳"이라 하여 이를 한자로 표기한 소라(所羅)로 정했다 한다. 여러 설을 종합해 보면 마지막 설이 가장 타당성이 높다.
폐성은 이서국의 최후 보루로 신라에 항전을 했으나 끝내 정벌 당하였다. 이서국 왕이 패주하여 성덕소(成德沼-淸道川)에 투신 자살함으로써 이서국의 최후를 장식하였다. 폐성(吠城)은 삼면이 절벽이고 남으로는 청도천이 흘러 천혜의 요새로 지리적 요건을 잘 구비한 교통의 요충지이기도 하다. 다만 협소하고 식수가 풍부치 못한 것이 단점이기도 하다.
병사(餠寺)
주구산 끝에 있는 절이다. 주구산의 형국이 개가 밀양쪽으로 달려가는 형태이므로 청도의 지기이 유실된다는 지리설에 따라 달리는 개를 멈추게 하려면 떡을 주어야 하므로 절이름을 병사(餠寺)로 하고 개의 옆구리에 해당하는 부분에 인공적인 토산(土山)을 만들어 이를 떡으로 간주하였다. 그래서 후인들은 이 산을 동송림(東松林)이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