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유래
경상북도 청도군 화양읍 토평리
상세내용
1리인 백곡(栢谷)은 이서고국의 왕성으로 그리 높지 않은 산등성이들이 견고하게 삼면을 에워싸고, 낮은 곳은 인위적으로 흙을 쌓아 천연의 산성 아닌 토성을 쌓았다. 왕성 남쪽인 앞은 청도천이 흘러 자연을 잘 활용한 왕성지로 건국연대와 국세(國勢), 멸망 연대도 두 설로 나뉜다. 그러나 이서국이 역사상 존재한 것은 사실이다.
2리인 와촌(臥村,瓦村), 3리인 은행정(銀杏亭) 모두가 토성산의 연속으로 방위(防衛)촌이며 성외(城外)촌이다.
1리인 백곡이 이서국 멸망 후 어떻게 되었는지는 문헌이 없어 알 수 없으나 기록에 수록되어 있는 주, 여, 강(江), 황(黃)씨들이 거주한 것은 사실일 것이다.
조선시대초부터 경주 최씨가 거주했다는 구전은 있으나 규명되지 못하였다. 백곡 이전의 동명도 미상이고 이 마을 주위산에 잣나무가 많아 "잣실"이라고 불렀는데 이를 백곡으로 표기한 것이라 한다.
와우촌(臥牛村),와촌(臥村-2리)
지형이 풍수상으로 소가 누운 형국이라 와우촌으로 불리게 되었다 한다. 동쪽에서 이 마을을 바라보면 흡사 소가 누운 것 같다.
은행정(銀杏亭-3리)
1500년 중엽에 김해인 삼족당 김대유 공이 정착했다. 그는 후진의 사표로 명성이 높았다. 은행정이란 마을 입구 산기슭에 두 그루의 은행노목이 있는데 농민들은 이 은행나무를 동리의 수호신으로 삼아 동제를 지내며, 주민들이 불행한 일이 있어 기원을 하면 효험이 있어 동명까지 은행정으로 했다는 것이다. 지금도 이 은행목은 동민들이 애지중지하는 신목(神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