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유래

제목청도읍 고수리

 

경상북도 청도군 청도읍 고수리

상세내용

남산의 봉우리들이 동네 뒤편인 남쪽을 막아 솟은 가운데 인산하록(人山下麓) 경사도를 따라 청도천변까지 거의 대부분을 차지한 고수리는 1916년 군청이 화양면에서 이설되고 경부선이 개설되면서 급속히 발달한 마을이다. 고수리일부(냉정, 양정, 산성동일부)가 화양읍에서 편입되어 현재의 1리, 2리, 3리가 되었다. 그 이전은 하남면에 속했던 수10호가 북쪽 방향으로 된 경사지에 취락되어 있었다. 7리는 다른 마을의 취락여건과 같이 높은 지대에 "찬물샘"을 식수원으로 하여 이루어 졌으며 시대적 산물로 발전된 곳이다. 이렇게 볼 때 1리, 2리의 내력이 가장 오래 되었고 다음이 7리이다. 그 밖의 마을은 다성씨(多性氏)로 단시일에 구성되었기 때문에 어느 성씨라고 기록하기가 매우 곤란하다. 특히 6리는 군 단위 각 기관이 자리를 잡자 일인(日人)들이 속속 입동하여 소위 일인촌이라 해도 지나친 표현은 아닐 정도가 되었다. 즉 구 국도변을 점유하게 되었다. 1920년대에 도로가 개통되자 도로 양변을 따라 다시 동서로 취락되어 길게 뻗어 나갔으며 산성(山城)시장이 이설되자 더욱 인구가 증가되었다. 고수리란 동명의 유래는 확실하게 알 수는 없으나 3리에 있던 성황당 부근이 고지대인데다가 거수(巨樹)들이 많아 붙여진 동명이라고 하나 고증할 길이 없다. 오래되지 않은 동명인데도 고증할 길이 없어 아쉬울 따름이다. 냉정(冷井)은 1리로 7리에 있는 "찬물샘"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일설에는 웅덩이를 파니 찬물이 솟아 붙여진 마을 이름이라고하나 믿기 어렵다. 여러 가지로 미루어 추측컨데 냉정이란 현 고수리 전체를 호칭한 동명이라고 볼 수도 있다. 양정(楊亭)은 2리로 범곡천변에서 청도천변까지 버드나무가 무성하게 굽어졌고, 당시에 동헌이 있던 소재지(현 화양읍 동상리)까지 가려면 이 곳을 지나가야 했는데 그때 이 버드나무 그늘에서 쉬어 갔다고 한다. 이로 인해 버드나무 그늘이 자연 정자와 같다고 붙여진 동명이라고도 하고 또 이 곳 천변에 실제로 정자가 있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이곳 냇가에 양류(楊柳)가 무성하여 좋은 휴식처가 된 것은 사실이다. 양정이란 동명으로 불리게된 것도 자연적이라고 할 수 있다. 3리에서 8리까지는 1900년대에 들어와서 새각단이니 신기(神技)니 하는 마을 이름도 있었다. 1리인 냉정에는 창녕 조씨가 처음으로 입주하여 밭을 개간하고 마을의 기초를 구축함에 진력을 다했다는 구전이 있었으나 알 수 없고, 1581년경에 경주인 이정탁 공이 정촌(원정동)에서 이사하여 정착했다는 설이 있다. 2리인 양정에도 1600년경에 1리에 입주한 정탁 공의 아우인 정익 공이 형을 따라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고수리를 전반에 걸쳐서 고찰 하면 경주이씨, 김해김씨, 밀양박씨, 고성이씨, 청도김씨의 여러 씨족들이 정착하여 그 후손들이 현재까지 면면히 이루어지고 있다.

냉정(冷井)과 납닥바위
구국도변에 있는 바위로 현 고수7리 즉 청도역 동편인데 경부선 철도 부설로 현재는 없어졌다. 이 바위는 10여인이 앉을수 있는 넓이에다 부근에는 찬물샘이 있고 거기에다 고목이 좋은 그림자를 이루어 밀양 등지에서 대구, 한양으로 또는 현풍, 창녕으로 가려면 이곳을 지나야 했다. 개나리 봇짐에다 짚신 감발로 지나는 나그네들이 이곳에서 쉬면서 목을 축이고 서로들 수인사를 나누면서 행선지, 용무 등을 이야기하고 다시 만날 장소로 약속하곤 하였다. 이로 인하여 남행, 북행시에는 이 바위에서 다시 만남을 기약하는 것이 관례가 되어 경상도 내는 물론 전국적으로 알려져 청도의 대명사가 될 정도로 알려져 있었다. 일제 중엽경까지 촌노들은 청도를 납닥바위라고 불렀다.